#남성용 빗접
#가체(加髢)와 도투락 댕기
#가체(加髢) 혹은 다리, 다래는 일종의 가발로, 근대 이전 한국의 여성들이 사용하였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여성들과 기생들이 가체를 사용하였다. 서양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여성들도 더 크고 무거운 가발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심해지자
1788년 조선 정조는 왕명으로 가체의 사용을 금지하였다(가체 대신
족두리를 쓰라고 했다, 머리를 꾸미고 싶으면.). 당시의 가체는 그 길이가 무려 1척(30.3 cm)에 이를 정도였다.
가체는 얹은머리형태로 양반층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층 부녀자에게도 크게 유행했으며 좋은 다래로 땋은 머리 를 틀어서 얹은 가체를 행사나 명절에 한번씩 사용하는 것을 큰 자랑이어서 일부 가정에는 재정적 부담이 과중해지는 결과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당시에는 부녀자의 가체를 통해 그 집안의 경제 사정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가체의 사치는 날로 심해져 조선 성종 때에는 30cm 높이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들어서 가체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가체의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가격대가 엄청난 사치품이 되었고, 최고 비싼 가체는 800냥에 달한것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기와집 2~3채, 혹은 노비 수십 명을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현대로 치면 최소 수십억 원에 달하는 사치품이었던 것.
그리고 여간 무거운 게 아니라서 어린 여성이 가체 때문에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도 많이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756년에 영조는 가체금지령을 내려 기본 쪽머리와 족두리를 권하기도 하였으나 이번에는 별의 별 보석으로 장식하여 사치스럽게 만드는 족두리가 유행하는 풍선효과가 발생하였고 결국 7년만에 가체를 다시 허용했다.
이후 1788년 정조 때 다시 강력히 단속했지만 이는 왕실 한정. 실질적으로 머리에 얹는 형태의 가체는 순조때
에나 가서야 대례식 한정으로 착용하게 된다. 이후 쪽머리가 유행하면서 본인의 땋은 머리를 가체와 함께 이어 크게 쪽을 지고 뒷꽂이 등과 비녀로 장식했다.
#큰댕기:궁중·양반집에서 신부가 예장할 때에 사용하는 댕기이며 도투락댕기라고도 한다. 짙은 자줏빛 비단이나 사(紗)로 만들어 뒤에 길게 늘이기 때문에 뒷댕기·주렴(朱簾)이라고도 한다. 나비는 10 cm 정도로 두 갈래이며, 윗부분은 삼각형으로 붙어 있고, 길이는 치마 길이보다 약간 짧다. 전체에 금박을 박아 화려하며, 위에는 석웅황(石雄黃)과 옥판을 달고 밑에는 석웅황·밀화(蜜花) 등으로 만든 매미를 5마리 정도 달아 두 갈래의 댕기를 연결하였다. 경기 이외의 남쪽이나 북쪽 지방에서는 금박 대신 비단색실로 장식하고 칠보꽃을 화려하게 둘레에 돌려 붙이기도 하였다. 북서 지방에서 혼례에 사용하였다는 고이댕기도 큰댕기의 일종이다.
모양은 남자용 빗접인데 먹물이 묻어있는 것을 보니 그전 소장자가 연상(벼루집)으로 사용했나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