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6년(세조 12)부터 15세기 말까지 전남 보성군을 중심으로 고흥, 장흥 등지에서 주로 제작된 한국 고유의 독창적 도자예술품들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분청사기는 그 제작기법이 중국으로부터 처음 수입된 고려시대부터 고려 정부의 철저한 감독 하에 정례화된 양식으로 만들어져 공납되고 있었다. 이는 조선이 들어선 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조선 세종~세조 시기에 이러한 분청사기 제작 비법이 극도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조선 세조 12년(1466)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이때 세조의 명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백자의 품질을 높이고 국가적인 브랜드로 도자규격과 인증제도를 정례화하기 위하여 경기도 광주를 비롯한 전국 백여개소의 가마를 국가 관요로 지정하고 각 관요마다 관리를 파견하여 제작된 도자기들을 하나하나 국가가 직접 검사, 인증하게 하는 한편 그 외의 다른 가마에서는 사적으로 백자기를 제작하는 행위를 엄금했다.
이에 따라 국가 지정 관요를 제외한 나머지 가마들은 법에 따라 더 이상 백자 제작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대신 고려 때부터 철저히 동일한 기법으로 정례화된 작품만을 만들게 했던 각 지방 가마들을 향한 국가의 감시과 감독이 이제 공식 지정된 관요로만 향하게 되면서 관요가 아닌 일반 민간 가마들에서는 더 이상 위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된 장인들에 의해 각종 독창적이고 개성있는 작품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평소 중하급 도자기들을 주로 만들어 관요가 거의 들어서지 못했던 전라남도에서는 독자적으로 초벌덤벙분장 도자제작기법을 개발하고 전남 지역 고유의 분청사기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15세기 말까지 수백여 년간 한국에서 분청사기들은 모두 중국에서 수입된 기법으로 만들어졌지만, 이때 만들어진 분장회청사기만은 한국에서 개발된 고유의 토속제작기법으로 번조된 것이다.
훗날 이 보성덤벙이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 몇 점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지배계급의 다회에서 말차를 마시는 다완으로 사용되면서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대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아끼던 미요시코비키(三好粉引) 또한 이 초벌덤벙이였다. 현대 일본에선 ‘호조코비키(宝城粉引)’라고 부르는데, 일본의 대명물(大名物·국보급)로 2점이 지정되었다.
이렇게 조선 세조 12년(1466)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한국의 고유 덤벙이들은 16세기 초엽부터 화려하고 세련된 청화백자들이 엄청나게 양산화되면서 그 물량에 밀려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