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표암 강공 71세 진
(豹菴姜世晃七一歲眞)
시·서·화 삼절로 불렸고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불리며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나 형이 귀양살이하는 것을 보고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렸다. 1773년 영조의 배려로 61세의 나이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병조참의와 한성판윤 등을 거쳤다.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아버지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현(鋧)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익만(翊晩)의 딸이다.
강세황은 집안 선조들과 임금의 두터운 관계로 영·정조에게 상당한 배려를 받았다. 1763년 영조가 그가 서화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하자, 이에 감격하여 이때부터 거의 20년 동안 붓을 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올바른 서화의 정통성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옛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이해한 서화관에 따라 전에 없던 여러 가지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시도했다. 진경산수를 발전시키고 풍속화·인물화 등에도 관심을 보임으로써 다양한 회화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부분적으로 서양화의 표현기법을 채용하여 색채의 농담으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등 여러 부분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와 함께 서화평에서도 높은 안목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정착에 기여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한 조선 후기 화단의 발달은 그에게서 영향받은 바 컸다.